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텍스트/~2020

나는 입이 없다 그리고 비명을 질러야 한다 ¹⁾ (2019+)

by DEM1VN 2020. 12. 10.

병을 같이 앓는 것과 대신 앓는 것 중 앞의 말이 더 로맨틱 한 이유를 아는가?

잘못 부르기 시작한 단어를 되짚으려면 무엇이 필요한가?

난데없이 세계를 망하게 하는 폭탄을 떠안게 된 자의 선택은 무엇일까?

자살 연습을 해 본 대로 목 매달아 버리고 싶지 않았을까?

그러기에 그의 세계에 과도한 희망이 넘실댈 때도 있었다

사랑하는 애인이 다정하게 말을 걸며 입을 맞춰오는 것,

그 다음은 애인이 그의 앞에서 목을 매달아 자살하는 모습.

애인의 여러 가지 죽음을 목도할 때마다 미친 듯 비명을 질렀다.

말할 수 없는 병은 새로운 병이 아니었고 아무도 관심이 없어서

그는 정말 미친 사람처럼 비명만 꽥꽥 지를 수 있었다.

어느 날 애인이 떠나고 그가 완전히 미친다면, 완벽한 신이 될 수 있을까?

어쩌면 이건 실험노트의 일부일지도 모른다.

 

 

 

 

 

1. 약속

 

한 행성이 반 바퀴를 도는 동안

나는 네게 혀를 쭉 빼물었고

너는 그걸 키스라고 명명했다

 

 


2. 나이롱 환자

 

누가누가 더 뾰족하게 혀를 내미나

우린 밤낮으로 내기를 했지

 

밤이 길어지면 낮이 짧아지고

낮이 길어지면 밤이 짧아지고

 

아쉽지 않으려면 온종일 키스를 해야 해

 

그런데 어쩌지,

우리 혀가 점점 길어지는 것 같아

이러다 자살한 시체처럼 축 늘어지면 어떡하지

한 손으로 입을 막고

다른 손을 마주잡은 채

 

우리는 병원까지 뛰어갔다

미친 듯 웃으며

 

의사가 진단표에 휘갈겨 쓴 바

사랑에 눈 먼 나이롱 환자 둘

 

그러나 이곳에 중증은 셋

쉽게 입원을 허락받았다

 

좁은 병상에서 네게 키스를 하며

더 아름다운 것을 보았지

 

너는 죽었다 깨어나도 볼 수 없을 것

 

이를테면

협심증狹心症인지 협시증狹視症인지

도무지 알 수 없는 병명으로

골몰하는 너의 얼굴

 

*

 

어느 날 네가 너스콜을 눌렀다

눈을 돌릴 수가 없어요

 

너는 정말 한곳만을 보며

꽥꽥 비명을 질렀다

 

아무도 병명을 몰랐던 건

최초의 환자가 너였기에

 

언제나 중심만을 응시 가능한 병

아침부터 저녁까지 비명만 지르는 너

 

하얀 가운을 입은 사람들

매일 네 주위에 몰려들었다

 

하얀 눈동자 속 검은 동공

하얀 가운 속 검은 환자복

 

너의 눈동자가 완전히 하얘지고

사람들은 더이상 찾아오지 않았다

 

있잖아, 네 이름을 따서 병의 이름을 지었대

 

치료를 궁리하는 것이 아니라

고작 이름을 짓기 위한 거였다니

 

혹시 너는 알고 있었던 거니?

그래서 비명을 질렀던 거니?

 

발병 이후,

너는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기도하는 것처럼

날마다 비명을 지르고

 

너의 성대가 망가진 틈을 타

병상에서 키스를 했다

 

이윽고 나는 꺼림칙한 것을 볼 수 있었다

하얀 눈동자에 일렁이는 내 그림자가 목 매달아 죽은, 혀가 덜렁거리는 시체 같아서

 

*

 

사랑에 눈 먼 나이롱 환자는 둘에서 하나로

돌팔이 의사는 또다시 네 옆의 병상을 줬어

 

사실 너를 처음 본 순간부터 지금까지

아프지 않은 날이 단 하루도 없었는데

 

이 말을 하면 지금 자리를 뺏을 것 같으니

너만 들어야 해 알겠지 나는 네 옆이 좋아

 

오늘의 너의 눈은 여기 머무르지 않았기에

오늘의 내가 너와 함께 있었다는 걸 못 보겠지

 

그래도 너의 눈을 들여다보며 말을 걸 것이다

언젠가 네 시선이 이 시간에 닿길 바라니까

 

- 01월 24일 8시 6분

 

알려 줄게 나의 오늘은 지금

네가 언젠가 마주칠 내가 여기 있다

 

멍하니 한 점을 응시하다

가끔은 눈물을 흘리는 너

 

내가 너의 곁에 없을 때

무엇을 보는지 묻고 싶었다

 

(묻는 대신 좋은 것만 보여 줄게)

(네가 본 대로는 죽지 않을게)

 

너와 같은 병을 앓고 싶었다

네게 최초로 발병해 네 이름을 딴 병

 

어떤 기대와 슬픔이 상상을 자극한다

꼭 하나씩 터뜨려야 한다는 걸 잊지 마

 

동시에 떠올리지 않으려고 애를 쓰며

나를 보지 않는 너와 키스를 한다

우리가 정의하기 이전의 키스를…….

 

 

 

3. 신앙 고백

 

어느 날이었다

 

뜬금없이 내 안구를 짓뭉개고 싶은 충동이 들끓었다

분명 네 동공으로 바늘이 달려들던 날과 같을 것이다

 

눈동자 안으로 몰려드는 바늘처럼

눈이 문드러져야만 쓰여지는 신화

 

죄를 짓고 인간 아닌 게 되어야

신화를 쓸 수 있다면

 

죄를 지어도 인간으로 남아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일을 하겠다

 

신이라면 절대 할 수 없는 일

인간의 죄를 신에게 고백하는 것

 

눈을 망가뜨리는 대신 천천히 성호를 긋는다

 

 

 

4. 진실

 

알잖아, 우리가 하던 키스는

진짜 키스가 아닌 것

 

그건 단지

 

 

5. 응시


여러 겹의 도형이 부서질 때

너는 신神 아닌 신身이 된다

 

표정이 자라지 않는 너의 얼굴을

화장이 번진 나의 얼굴에 겹치면

 

그렇게

영영

돌아오지 않을 것을 생각하며

한 방향으로


1) 할란 엘리슨 단편 『나는 입이 없다 그리고 나는 비명을 질러야 한다』 제목


2019년에 적었던 친구를 방금 손보게 되었습니다. 

만지다 보니 네 시간이 그냥 가네요. -__-;

고민이 필요한 부분이 산더미처럼 남아 있지만 일단 공개 처리는 해 둡니다. 천천히 수정합니다.

메롱을 

누가 

더 

오래 

버티는지

자살 예행 연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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