텍스트11 폭설 (2019) 시베리아 횡단 기차에서 (191229) 적었던 메모 기차를 타는 내내 눈이 내리는 풍경을 보지 못했다 눈의 흔적을 쫓아 나아가던 기차는 날씨 탓에 자주 멈췄다 담배 냄새가 칸과 칸 사이에서 흘러왔다 폭설은 영원히 지속된다 파티처럼…… 열차는 조용히 출발한다 떠나는 법을 모르는 불청객 소음은 발자국처럼 두통을 남긴다 너무 어두운 밤에는 별이 보이지 않았다 창문에 걸린 얼음이 뻐끔뻐끔 녹는다 침대보가 누렇게 익어갈 때, 안녕을 고하기 좋은 아침 살가죽을 뚫고 자라는 서리에 십자말 퍼즐을 맞추던 사람들 칸과 칸, 나무와 나무, 유리와 유리...... 국경처럼 풍경을 분지른다 아무런 다리가 놓이지 않았다 * 안녕, 되짚어 말하면 모두의 모국어로 한번씩 되짚어 말하면 그것은 그리움 2020. 12. 11. 무대 (2020) 한도윤 생일 기념으로 짧게 적었던 2차 창작입니다. 다음 순서를 기다리고 있다. 나란히 앉아있는 사람들을 지나친다. 뒷목을 문질렀다. 환상통을 느낀다. 가벼워지고 싶다. 가벼워진다. 지금 환복하세요. 새 착장을 입는다. 새 옷은 물든 팔을 가려준다. 이명이 사라진다. 마음에 든다. 덜어낸 만큼의 통증을 참는다. 무대에 올라간다. 카메라가 너희를 찍는다. 카메라는 너를 찍는다. 카메라는 너의 등을 담는다. 뒤통수가 찍혔지만 얼굴이 방영된다. 스크린에 다가간다. 스크린에 얼굴이 비친다. 조형된 얼굴 위로 진짜 얼굴이 겹친다. 깨끗하게 겹쳤다. 머리카락만 보여요. 아직 잘리지 않았어요. 너는 얼굴이 보인다고 말할 수 없다. 입을 다문다. 카메라가 부서진다. 스크린의 얼굴도 꺼졌다. 진짜 얼굴은 여전히 비친다... 2020. 12. 11. 나는 입이 없다 그리고 비명을 질러야 한다 ¹⁾ (2019+) 병을 같이 앓는 것과 대신 앓는 것 중 앞의 말이 더 로맨틱 한 이유를 아는가? 잘못 부르기 시작한 단어를 되짚으려면 무엇이 필요한가? 난데없이 세계를 망하게 하는 폭탄을 떠안게 된 자의 선택은 무엇일까? 자살 연습을 해 본 대로 목 매달아 버리고 싶지 않았을까? 그러기에 그의 세계에 과도한 희망이 넘실댈 때도 있었다 사랑하는 애인이 다정하게 말을 걸며 입을 맞춰오는 것, 그 다음은 애인이 그의 앞에서 목을 매달아 자살하는 모습. 애인의 여러 가지 죽음을 목도할 때마다 미친 듯 비명을 질렀다. 말할 수 없는 병은 새로운 병이 아니었고 아무도 관심이 없어서 그는 정말 미친 사람처럼 비명만 꽥꽥 지를 수 있었다. 어느 날 애인이 떠나고 그가 완전히 미친다면, 완벽한 신이 될 수 있을까? 어쩌면 이건 실험노트.. 2020. 12. 10. 무제 3 (2018) 반짝이는 것을 모으는 습관이 생겼다. * 내 몸은 유리로 구성되어 있지만 점점 어두워졌다. 빛이 한점으로 모이면 일기장 속 신의 목록을 경신했다. 이름들이 곡선처럼 흔들렸다. 그런 날에는 눈꺼풀 속에서도 눈이 부셔 잠들 수 없었다. 음성은 끝부터 검어진다고 내게 일러주던 여자가 있었다. 여자는 자신을 제일이라고 소개했다. 거울속의 여자가 토막난 목소리로 주파수를 쏘아올리자 발끝부터 환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숫자를 거꾸로 세었더니 달팽이관에 갖힌 양떼들이 자꾸만 문밖으로 튀어나왔다. 스멀스멀. 제이는, 제삼은……. 몰려드는 얼굴들이 지옥같아 메아리 같은 무리에 우두커니 서 밝아지는 법을 복기했다. * 모든 반짝이는 것들을 신으로 여겨 벌을 받는 마음으로 기도문을 옮겨적었다. 아무리 어두워도 반사광은 줄지 .. 2020. 12. 10. 이전 1 2 3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