짝을 바꾸는 날은 정기적으로 사랑을 믿고 싶었지
누군가 내 닳아빠진 연필을 알아채 주길 바라서…….
한 교시 내내 종이를 오려 접어도
칭찬 받는 날이 어김없이 돌아왔다
미끈한 얼굴은 어떤 마음일까
마음속으로 질문을 하면
더 반듯하게 잘리는 종이
운명은 마주치는 것
매일 만나는 짝꿍처럼
누구도 고를 수 없게
꾹꾹 힘을 주어 접자
내가 조물주라면 사람도
제비처럼 만들었을 텐데
휘갈겨 쓴 숫자는 새와 어울리는 심장
오리고 쓰고 접고 쌓기,
오리고 쓰고 접고 쌓기
모든 제비에 같은 시간을 쓰는 건
나와 필통 사이의 비밀스런 약속
*
오래도록 많은 말을 담아 날려 보냈다
시작은 있지만 끝은 없는 게 전파라면서
그렇다면 영영 살아 있을 나의 편지
누구라도 좋아 보이저호나 우주 떠돌이라도
주파수가 맞는다면 듣고 답해 주길
언젠가 네가 교실을 떠올릴 때면
조개껍질 속 소리 같은 야릇한 속삭임을 듣겠지
가끔은 어떤 제비에 좀 더 많거나 적은 말을 쏟았어
가령 방학식 다음날 분실물이 보냈던 신호를 뒤늦게 수신하고 말았던 때라거나
축축한 제비를 찢지 않는 건 더 가끔의 일
아주 조금 젖어 나만 아는 만큼 무거워진 제비들은
두고 오거나 두고 간 애에게 가닿길 무심코 바랐던 것 같다
그러나 알지 못한다면, 그것 역시 운명
*
새 교과서를 받는 계절의 끝엔
내게 또 하나의 몽당연필이
수상한 놀이가 유행하는 달엔
교실에서 실종자가 늘어난다
오늘은 편을 가르지 않아도
즐거운 놀이를 하자 부탁이야
(얼굴은 돌려 줄 수 없지만 모두를 가려 줄게 )
꽁꽁 숨길게 꼭꼭 숨어라
주문을 외우며 제비를 접자
아주 똑같게 접었어
어때 정겨워 보이지
*
오늘은 모두가 깍두기
울지 마 전부 발견해 줄게
길쭉한 종이를 여는 전원이 술래
우연 아닌 운명을 믿는다
그래도
가장 처음의 말은 언제나 필통.
가장 은밀하게 말해 봐도 필통,
가장 좋아하는 마음도 필통!
*
어느새 마지막 제비를 만드는 날
몰래 한 장을 더 접어 넣었다
우체통처럼 활약해 준 필통을 위한 제비
그래도 똑같은 크기로 반듯하게
왜냐면 나는 운명론자니까
안녕을 말하고 싶었다 들키지 않고
운명과 기적은 다르지만 오늘은 같을 거라 믿었고
남은 한 장이 쏙 사라졌다
짜리몽땅한 필기구 사이로
필통이 처음으로 뽑은 제비
마지막을 축하하는 졸업장
녹슨 지퍼를 끝까지 올리고
수고했어, 하이파이브
지퍼 손잡이가 툭 떨어진다
역시 운명과 기적은 필통
졸업장은 악수와 함께 받는 것
낡은 우체통과 나는 서로의 졸업생
기껏 그럴듯한 인사를 준비했는데
졸업장을 교환하자마자 너는 쿨쿨 잠든다
어쩔 수 없지 이게 운명이라면
고집스레 입을 다문 내 친구여, 안녕
*
책가방에 잠든 너를 넣던 중 깨달았지
필통과 우체통은 전혀 닮은 구석이 없어
그래도 괜찮아 나는야 졸업생
분실된 사람은 없는지 마지막으로 확인
남아있는 술래가 없다면 불을 모두 끌게
임무 중 이상 무, 이제 정말 졸업하겠습니다
여기 있었던 적 없는 입학생 같은 기분이 들어
멋쩍게 문을 닫고 교실을 나선다
부칠 편지가 남지 않아서 뒤돌아보지 않았다
*
필통은 오래 전 사라졌다 지퍼 머리만 남기고
녹슬고 벗겨진 졸업장
너를 만지면 문득 궁금해져
짧은 연필 사이로 부쳤던
편지의 항해 일기가
지금쯤 제비는 어디까지 갔을까
아주 먼 우주까지 날아간 건 아닐까
어쩌면 필통도 같이 떠났을지도 몰라
우린 어디로든 갈 수 있는 졸업생이잖아
답장은 어디에서 부쳐질지 어떤 언어로 적힐지
언제 받을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이건 알지
확실해,
그건 몽당연필로 적힐 편지야
'텍스트 > ~2020' 카테고리의 다른 글
더하기 (2018) (0) | 2020.12.10 |
---|---|
무제 2 (2019) (0) | 2020.12.10 |
무제 1 (2019) (0) | 2020.12.10 |
소행성 (0) | 2020.12.10 |
동시발생애인 (2020) (0) | 2020.12.10 |
댓글